몇 년 전 어느 계간지에서 ‘세월호 이후의 드라마’라는 주제로 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호와 드라마라니. 어쩐지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붙들고 씨름한 끝에 졸고를 제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제가 포착한 드라마의 흐름 중 하나는 ‘붕괴한 시스템에 관한 분노와 불신’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학교나 검찰 등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사회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곳이 도리어 가장 불의한 곳으로 등장했고, 이 불의한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분노하며 분투하는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붕괴한 시스템’을 드러내는 게 2010년대 이후 드라마의 주요 흐름이라면 그다음에는 어떤 이야기가 유통되고 있을까요? 바로 ‘사적 복수’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공정해야 할 시스템이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사회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사적 복수’ 이야기가 늘어났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 2021년에 방영된 <빈센조>와 <모범택시>, 그리고 <펜트하우스>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의로운 검사, 약자의 편에 서는 변호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복수를 하거나 ‘모범택시’와 같은 복수 대행 조직을 만들어 악을 심판하게 된 것이죠. 마치 “이탈리아는 마피아들만 마피아 짓 하죠? 그런데 어쩌죠? 한국은 전부 다 마피아예요. 국회, 검찰, 경찰, 관공서, 기업 전부 다요!”라고 일갈하던 <빈센조>의 대사처럼 공적 시스템을 소수의 불의한 이들이 사유화하는 ‘마피아’ 같은 사회에서 평범한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인 것처럼 말이지요.
이런 흐름은 최근 방영된 <빅 마우스>에서도 발견됩니다. 드라마 속에 존재하는 ‘빅 마우스’는 폐수를 흘려보내 그 지역 주민들을 병으로 죽게 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대기업 및 권력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조성된 비밀 결사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납치나 감금 등을 서슴지 않습니다. ‘빅마우스’의 활약으로 결국 절대악이었던 구천 시장 최도하의 죄가 드러나지만 드라마는 사법적 심판이 아닌, 복수의 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최도하를 심판합니다. 자신이 흘려보냈던 폐수를 마시고 죽게 된 것이죠. 문제는 최도하 또한 탐욕스러운 기업에 의해 가족을 희생당한 상처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죠. 즉, 악이 악을 낳고, 그 악이 또 다른 (조금 정의로운) 악당에 의해 심판을 당한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우선 ‘사이다’와 같은 쾌감을 줍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악의 연대’가 승리하고 정의가 무력하게 패배하지만, 드라마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시고 나면 더 깊은 갈증을 느끼게 하는 사이다의 속성처럼 더 독한 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흐름이 한국 드라마의 대세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자극적인 ‘사적 복수’ 드라마가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또 한 번의 비극적 사건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신당역에서 순찰을 돌던 여성 역무원(A)이 자신을 스토킹 하던 남성(B)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수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일상적 공간인 화장실이라는 점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A씨가 그저 무기력하게 당한 게 아니라, 자신을 수년 동안 스토킹 하며 몰래카메라를 찍어 협박하던 B씨를 상대로 고소를 하는 등 법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신뢰한 보통의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A씨는 피습을 당해 목숨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비상벨을 누르며 다른 시민에게 위험을 알리고 범인을 잡는 데 기여했습니다.
A씨를 추모하기 위해 신당역에 방문하니 시민들이 붙여놓은 수많은 추모의 글이 보였습니다. 그중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국가는 왜 존재합니까?”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민이 쓴 문장처럼 “죽지 않고 일할 권리”일뿐이었을 텐데 우리 ‘시스템’은 왜 그런 평범한 바람을 이루는 데 사용되지 못할까요? 국가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기업이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을 때 성실한 노동자는 일하다 죽고, 무고한 시민은 일상적 공간에서 살해를 당합니다. 이런 사회가 지속되는 한 ‘사적 복수’ 이야기는 더 독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